헤더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여암 정동성

여암 정동성

한 마음으로는 만 가지 일을 할 수 있지만
두 마음으로는 한 가지 일도 할 수가 없다.

여주에 가 본 사람이면 알 것 이다. 여주대학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여주대학이 얼마나 짧은 기간에 얼마나 휼륭하게 세워졌는지를! 그리고 여주대학이 '한국의 MIT'를 향한 雄飛가 얼마나 큰가를! 거기에는 4.19혁명의 우렁찬 함성이
들려오고, 나라와 겨레에 대한 열망이 메아리 치며, 깊은 人間愛에 뜨거운 가슴을 자랑하는 萬年靑年의
'인생오케스트라'가 파동친다. 거기에 바로 鄭東星의 못다한 祖國과 民族과 育英에 대한 雄志가 남아있다.
驪巖 鄭東星 60年 回甲文集 中

그가 여주에 남긴 업적은 너무나 많지만 그 중 손꼽히는 것은 여주대학 설립, 공설운동장 건립, 세종국악당 설립이다.

그밖에 여주대교 건설, 여주군민회관 준공, 여주의 도자기 산업육성과 국도, 지방도 확장포장, 여주-이천관광도로 계획 확정, 여주 중부 내륙 고속도로 계획 수립, 대신면 강변 제방공사,
각 읍면 경로당 건립 등등, 여주 땅에 그의 정성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그에게는 이미 11대 국회의원 때부터 대학을 세우겠다는 비전이 서 있었다.

전국에서 그 명성이 손꼽히는 존재가 된 여주대학은 이제 ‘정동성 개인의 대학’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여주의 대학’으로 탈바꿈하였다. 여주대학 설립자인 여암 정동성 박사는
1939년 7월 8일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점봉리에서 태어났다. 경주 정씨 양경공(良景公)의 18대손으로 교육자이셨던 정해진(鄭海振)선생과 교동 인씨 인순임(印順任)여사의 1남 2녀중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활달한 성격에 총명하고 건장하였던 여암은 여주군 능서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유학길을 나서 천주교 재단인 동성 중·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4 ·19 당시에는 전국대학생 총연합회 의장을 지냈다.

체육학을 전공한 그는 정치학을 다시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미국 애리조나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0대에서 13대까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4선의원의 명성을 얻었고 국회체신위원회 위원장, 국회 상공위원회 위원장, 국회 내무위원회 위원장, 국회 운영 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체육청소년부 장관에 임명되어 분단 45년 만에 남북 스포츠 교류와 남북 단일 축구팀구성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남겼으며, 1990년 남측 축구단을 이끌고 평양을 공식 방문하여
남북축구통일대회에 참석하였다. 이어 ‘90북경 아시안게임 남북 공동 응원’, ‘91포르투칼 세계청소년 축구대회 남북 단일팀 출전’등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촉망받는 4선 의원’, ‘뚝심과 의리의 정치인’이었던 그가 정계를 떠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져 가고 있던 때 그는‘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만학의 정치 학도가 되어 대학원을 다녔으며 명예 법학박사, 교육학박사, 체육학박사,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교육과 후학 육성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1979년 재단법인 세종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수많은 인재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평소 정계에 몸담아 왓던 그는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기는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부터는 국가와 민족에 봉사하는 일꾼을 길러내겠다”는 일념으로 교육 사업에 전념하였다.

1993년 ‘한국의 MIT'를 꿈꾸며 여주공업전문대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개교 10년 만에 우리나라 대학사에 일찍이 유례가 없는 최단 시일 내에 우수 대학으로 발전시켰다.
그 후 전국사학법인연합회와 전국전문대학법인협의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만든 여주대학은 현재 전국 전문대학 중에서 최고의 캠퍼스와 6,000여 명의 우수한 인재들이 진리와
학문을 닦는 상아탑으로 유명하고,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전국종합우수대학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는 ‘창의적인 노력’과 ‘진취적인 기상’이라는 교육철학과 ‘인간다운 사랑, 아름다운 봉사, 정의로운 실천’을
학훈으로 내세워 이 시대, 이 국가, 세계가 요구하는 유능한 인재 양성에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그의 나이 60. 짧은 삶이었다. 그러나 불꽃처럼 강렬하게 살면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만년 청년 정동성’. 그는 정결하고 순수한 영혼이 되어 하늘나라로 갔다.
그는 교육자로서의 꿈을 못 다 이루고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발자국을 포개는 교정의 젊은이들에게 그의 발자취는 늘 큰 가르침이 될 것이다.

정동성 박사